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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어깨의 레이스 장식이 독특한 누드톤 터틀넥은 알레산드로 델라쿠아(Alessandro Dell’Acqua at Koon), 가죽 미니스커트와 부츠는 샤넬(Chanel), 해골 모티브의 반지는 에이치알(HR at Koon).
(오른쪽) 아티스틱한 페인팅의 원피스는 디올(Dior), 실버 부츠는 손정완(Son Jung Wan), 레이스 헤어 장식은 샤넬(Chanel), 링과 브레이슬릿은 에이치알(HR at Koon).

김혜수의 장점은 지금 자신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정확히 안다는 것이다. 이를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드러내는 운용의 미를 발휘하는 세련된 여자. 황금색 가발을 쓴 채 스팽글로 박음질된 미니스커트를 입고 트렁크 위에 올라가 춤을 추어도, 모피를 걸치고 은색 캐비닛 안에 구겨져 있어도, 박시한 화이트 셔츠 아래 구멍 난 검정 스타킹만 신고 그르렁거려도 뇌쇄적일지언정 불순해 보이지 않는 김혜수. 국적을 알 수 없는 음악에 몸을 맡기고 조리개 닫히는 속도에 맞춰 동작을 딱딱 끊어내느라 여배우의 콧잔등엔 땀이 맺혔다. 부산한 두 대의 방송 카메라와 날카로운 김용호의 카메라, 그보다 더 날선 구경꾼들의 시선 속에서 그녀는 별로 말이 없었다. 동적인 듯 정적인 분위기, 그리고 백치처럼 도도한 여배우! 해골 천지인 최범석의 ‘제너럴 아이디어’ 숍은 김혜수의 파격적 의상과 서늘한 표정, 드러난 허벅지와 과감한 행동(카메라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 올리는 매력적인 모습!)과 묘하게 매치되었다. 다른 여배우들이 스크린 뒤에 숨어 신비주의 전략으로 몸값을 올리는 동안, 정직하게 그녀만의 기운을 뽐내 온 김혜수. 오늘도 마릴린 몬로로, 마돈나로, 거리의 이름없는 여인으로, 그리고 화투판 남자들을 후리는 정 마담으로 자신을 드러냈다.

오늘 김혜수와 <보그 코리아>와의 만남은 <타짜>의 홍일점, 정 마담을 더욱 컬러풀하고 에지 있는 ‘퍼펙트 팜프파탈’로 재현하는 자리다. 거친 계산이 난무하는 화투판과 한 남자(극중 고니, 조승우가 맡았다)의 욕망을 설계하고 농락하는 강렬한 여자.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싶고 취한 건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교묘한 여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기가 소진될 것 같은 백 년 묵은 고양이 같은 여자, 정 마담. 저기, 금발 머리의 나쁜 여자는 김혜수와 잘 어울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 마담 같은 팜므파탈은 그녀에게 ‘최초’의 악역이다. 미안하지만 ‘최초’라는 말을 자꾸 갖다 붙이는 것도 대중이, 우리가 기대하는 김혜수와 김혜수가 보여 준 김혜수 사이의 괴리 때문이다. “선뜻 하겠다고 해놓고 일주일은 고민한 것 같아요. 결국 잘난 척 말고, 겸손하게 주위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하자고 결론지었죠. 그랬더니 여유가 생기더군요. 헌데 정 마담은 나와 너무 달라서요. 난 착한 여잔데….” 통통한 얼굴(물론 지금은 살이 내려 성마르게 보이기도 하지만)과 깡마르지 않은 몸, 콧등을 찡긋거리는 웃음 등 그녀를 정의한 특징 때문일까. 그러고 보니 여태껏 김혜수는 위험한 여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2006년 8월 7일 오후 2시의 이순간, 그녀에게 주어진 이 역할을 완벽히 수행하고 있다. 김용호 작가에게 피사체 김혜수에 대해 물어보았다. “포토그래퍼의 마음을 너무 잘 알고 반응하는 최고의 모델이에요. 어떤 표정을 원하는지, 무엇을 찍고자 하는지 배려를 많이 하죠. 솔직히, 그건 장점이자 단점이에요. 세상의 창조적인 아티스트들을 보세요. 철저히 이기적이고 자기 생각만 했잖아요.” 이것이 배우 김혜수의 야누스적 희비극의 시작이다. 완벽주의는 주위를 피곤하게 만드는 반면 탁월한 연기를 담보한다. 하지만 김혜수에게는 그러면서까지 자기 몫의 연기와 명성을 챙기려는 배짱이 없다. 생각도, 배려도 많은 그녀는 세상만사에 무심하고 오로지 연기에만 몰두할 수 있는 개체가 될 수 없다. 허나 이성은 감성을 따라가지 못하고, 감성은 본능을 추월할 수 없는 법. 다행인지, 불행인지 김혜수는 감성만큼이나 이성이 날카롭게 살아 있는 여인이다. 요즘 그녀에게 소소한 일상의 재미를 선사하는 미니홈피에 들어가 보라. 달리, 고흐, 피카소… 등 세기의 천재들에 대한 프로필과 격언들로 가득 차 있다.

(왼쪽) 케이트 모스가 그려진 실크 티셔츠는 버핏(Burfitt at In The Woods), 스팽글로 장식된 볼레로는 손정완(Son Jung Wan), 그레이 레깅스는 매긴 나잇브릿지(McGinn Knightsbridge), 블랙 에나멜 슈즈는 구찌(Gucci).(오른쪽) 한쪽 어깨를 강조한 블랙 새틴 원피스는 로에베(Loewe), 해골이 프린트된 화이트 티셔츠는 W5H, 보라색 에나멜 펌프스는 구찌(Gucci), 컬러풀한 스톤이 장식된 오렌지색 가죽 글러브는 손정완(Son Jung Wan).

(왼쪽) 비대칭을 이루는 톱과 스커트는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ne Westwood), 20cm 높이의 하이힐은 더 푸쉬 버튼(The Push Button), 화려한 크리스털 브레이슬릿은 빌렛(Villet at Koon).
(오른쪽) 풀스커트처럼 폭이 넓은 화이트 셔츠는 박춘무(Park Choon Moo), 송치 소재의 표범무늬 슈즈는 루이 비통(Louis Vuitton), 체인 목걸이는 빌렛(Villet atKoon).


세상에 대한 호기심은 인간 김혜수를 빛나게 하고 배우 김혜수를 수혈하는 에너지다. 영화 <헤드윅>을 본 후 존 카메론 미첼에게 이메일을 보내고 <로사스> 공연 후 빔 반데부르스키를 만나러 무대 뒤로 뛰어간 그녀. 영화 <타짜>를 만난 것도 그런 마음이었다. 물론 최동훈은 이제 두 번째 영화를 찍고 있지만 그녀는 영감을 주는 사람이라면 연륜과 나이를 상관하지 않고 존경할 수 있다. 1986년에 데뷔해(영화 <깜보>) 오랜 시간 쇼 비즈니스의 세계에 살아 연기가 제 몸의 일부가 된 여배우에게는 일종의 패기 같은 것. “어떤 감독이든 김혜수에게 역할을 제의하기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타짜>가 정 마담을 위한 영화도 아니구요. 선뜻 제의할 수 없죠. 아마 제가 먼저 뛰어들지 않았다면 전 <타짜>를 만날 기회를 잃었을지 모릅니다.” <타짜>의 정 마담은 툭툭 끼어드는 에피소드의 주인공 혹은 주인공 고니의 주위에서 그를 위해 존재하는 인물이다. “제겐 새로운 에너지가 필요했습니다. 좋은 감독, 좋은 배우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자극 받고 어떻게 성장할지 배우고 싶었습니다. 좋은 배우들과 함께했을 때 희열이 있다는 건 <YMCA 야구단>을 통해서 알게 되었죠. 사실 그 영화의 정림 역은 너무나 전형적인 캐릭터임을 알지만요.” 그녀는 내내 동료들을 칭찬했다. “승우 씨는 후배지만, 전 그분을 후배로 대할 수가 없어요. 연기는 경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더군요. 어쩌면 저런 연기를 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탁월한 배우지요.” 혹은 “두 번째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치밀하면서도 원대합니다” 등등.

언젠가부터 배우 김혜수가 달라졌다는 얘기가 나돌기 시작했다. 그동안 김혜수라는 스타를 원했고, 소비했던 매체와 대중들은 <쓰리> <얼굴 없는 미녀> <분홍신>에 이르자 그녀가 ‘변신’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변신이란 목적성이 강한 작위적 행동이다. 하지만 김혜수는 야심작을 만나 무언가를 억지로 만들려고 한 적은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대배우, 톱여배우가 되겠다는 야망이 없었어요. 문화적인 아이가 아니었던 전 그저 문화, 예술적으로 크리에이티브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호흡한다는 사실 자체가 좋았어요. 영화 속 내 모습이 어떻든, 영화가 호평 받든 흥행하든 그건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내 문화적 취향은 모두 그간 만난 사람들에게서 얻은 겁니다.” 스스럼없는 고백 속에서 이제 그 이상의 의미를 찾으려는 김혜수. 자연스러운 욕망과 바람과 호기심을 위해서 스스로 몸을 낮추기도, 찾아 다니기도 하면서 일을 즐기고 있다. <마라톤> 정윤철 감독의 두 번째 작품 <좋지 아니한 家>에도 우정출연이긴 하지만 실제론 조연만큼 많은 분량으로 출연을 자청했다. 백수 같은 무협 작가 지망생 이모로. 코미디 연기에 자신 없다던 그녀가 선사하는 엇박자의 세련된 유머, 과연 어떤 색감일까. “어떤 김혜수를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는 정윤철 감독의 발언까지 기대를 증폭시킨다. 한 젊은 남자를 두고 후배 윤진서와 각축을 벌일 <바람 피기 좋은 날> 역시 캐릭터의 전형성이 삭제되어 있다.

우리는 가발을 쓰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몸을 흔드는 김혜수가 아니라 사방이 섬세하게 조각된 고운 여배우의 방에서 빠져 나와 한결 자유로워진 김혜수를 보고 있다. 이제까지 김혜수는 예측 가능한 배우였지만 더 이상은 아닐 것이다. 조연으로, 다작으로, 우정 출연으로, 여배우의 미덕이라 여기던 우아한 자가당착에서 빠져 나온 김혜수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연기에 대한 순정을 지켜 가고 있다. 촬영 직전 식사를 하면 옷 태가 안 난다는 이유로 피자 두 쪽으로 점심을 때우고, 장장 7시간의 화보 촬영을 마친 후 두 개의 방송 인터뷰를 거쳐, 두꺼운 속눈썹이 무지막지하게 무거운 와중에 치른 마지막 <보그> 인터뷰까지, 그녀는 성큼성큼 내달렸다. 그 와중에도 매니저에게 촬영 모습을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마음 같아선 셀카를 찍고 싶었을 것이다. 김혜수가 ‘건강 미인’이라면 목적보다 과정이, 계산보다 순정이 앞서는, 여전히 건강한 에너지 때문이다. 감히 그녀가 최고라고 말하지 않겠다.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이제부터 더욱 흥미진진한 혹은 위험한 김혜수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새삼스럽게 농익은 채 늙지 않을 청춘, 김혜수라는 여배우를 가진 것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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